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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와 문화, 미래의 가치를 품고 있는 서울 한양도성에서
      우리의 가치를 경험할 수 있는 길을 찾고, 그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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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ORY
    Ep.11 숙정문에서 그 후로도 오랫동안

    우리가 만드는 문화유산, 한양도성 11화

    김남길, 숙정문에서
    그 후로도 오랫동안

    2016년 11월 3일 연재

    드디어 순성장거의 마지막 길이 시작됩니다. 창의문을 지나, 산속에 자리한 '숙정문'으로 향합니다. 창의문 안내소에서 신분증 확인을 하고 받은 출입증을 목에 걸고 북악산 순성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안내소 옆을 에둘러 산의 능선으로 힘차게 이어지는 성벽이 보입니다. 부암동 마을 풍경을 구경하며 올라갑니다. 슬그머니 총안 사이로 손을 넣어보니 손끝으로 산들바람이 스쳐 지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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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악산 능선으로 힘차게
    이어지는 한양도성

    중간에 멈춰 서 바로 뒤를 돌아보니 흡사 낭떠러지를 닮은 풍경에 그저 앞으로 걷기만 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순성길이 가진 특유의 고요함은 잠시 멈춰 서서 숨고를 때마다 여유를 되찾게 해줍니다. 사실 그 덕에 더 특별한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땀을 실컷 흘리며 걷다가 잠시 여장 너머로 절경을 볼 때는 무언가 쟁취한 것만 같습니다. 그 순간에는 좀 더 자유로워지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실제로 점점 높이 올라가니 구름 위에 붕 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이대로 하늘 가장 가까이 손이 닿을 것만 같습니다.

    계단 사이사이 떨어져 있는 솔방울들을 쓸데없이 세우며 걷다 보니 더 이상 마을도 보이지 않습니다. 공기부터가 정상에 다다랐다는 느낌을 줍니다. 숨을 크게 내쉬면 풀잎에 묻어있던 솔잎 잔향이 몰려듭니다. 그러다 어느새 소나무 숲 한가운데에 서있습니다.

    그런데 길 한편에 빨간색 타원형 점을 찍은 소나무가 보입니다. 자세히 보니 총탄 자국 표시입니다. 그리 크지도 않은 나무 몸통에 정말 여러 자국의 상처가 나 있습니다. 안내판을 보니 이 나무가 1.21사태 소나무라는군요.

    수령이 200년 정도 된 소나무인데 15발의 총탄 자국이 남아있습니다. 이 자국은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하려고 침투한 북한 특수부대원들과 우리 군경이 교전한 흔적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아늑한 소나무 숲과는 다른 격전지를 지나 다시 고요한 계단을 내려갑니다.

    그렇게 얼마 안가 숙정문까지 1.2KM 앞, 청운대를 알리는 안내판 앞에 섭니다. 한양도성에서 가장 고도가 높은 곳이라는 데, 그 밑으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입니다.

    마치 한편의 드라마를 엮어내듯이 그 좌우로 이어지는 도로와 마을과 마을의 경계까지 담깁니다. 당장이라도 양팔 벌려 품으면 한 번에 안을 수 있을 만큼 온 서울 시내가 작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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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의 풍경 속에서
    다가오는 모든 것들

    이제 청운대에서 산 밑으로 내려가는 성 밖 길로 걸어 내려옵니다. 왼쪽으로 나 있는 철조망과 체성 사이를 암문이 나올 때까지 걷습니다. 정면으로는 녹음이 우거진 산봉우리가 보입니다.

    새삼 산 한가운데에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이렇게 잘 정돈된 길을 쉽게 걷고 있으니 말입니다. 길이야 성벽을 따라 걸으면 산속에서 미아가 될 일이 없고, 초입에 계단이 힘들어서 그렇지 항상 성벽 곁으로 걷기 편하게 길이 나있습니다.

    암문 안으로 들어가면 정면에 보이는 장승 옆으로 나무 울타리가 길을 막고 있습니다. 이 길로 숙정문으로 가는 길이 맞는 것인가 갸우뚱하실 수도 있습니다. 오는 동안에도 한양도성 안내판이 한동안 안 보였기에 불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그대로 왼편으로 쭉 걸어가다 '백악 곡성'이라 표시된 안내판을 봤다면 잘 가고 있는 겁니다.

    곡성은 막상 보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성벽이 쌓인 형태를 자세히 보면, 지금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지던 성벽과 다르게 타원형으로 둥글게 성벽이 굽어져 있습니다. 주요 지점이나 시설을 방어하기 위해 성벽 일부를 밖으로 둥그렇게 돌출시켜 쌓은 성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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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속 깊은 곳에
    숨겨놓은 숙정문

    백악 곡성에서 얼마 걷지 않아서 다시 성 밖으로 보이기 시작한 마을 풍경과 소나무 숲을 지납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단청 지붕이 보입니다. 처음 봤을 때는 그 모습이 새것 같아 정자인가 했는데, 좀 더 가까이 가자 지대가 낮아지면서 성문의 온전한 모습이 보입니다.

    드디어 순성길의 마지막에서 숙정문을 만났습니다. 파란 하늘을 이고 있는 처마 끝으로 솟아있는 소나무의 그늘 옆, 숙정문 홍예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숙정문은 조선시대 대부분 폐쇄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당시 여인들은 설날이 되면 숙정문에 가서 기도를 올리는 풍습이 있었답니다. 계곡 끝자락에 자리 잡은 이곳이 음기(陰氣)가 강해 최고의 기도처라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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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와 마주한 지금,
    미래로 가는 한양도성의 길

    조선 태종 때 풍수가로 이름난 최양선은 숙정문을 막아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는데, 백악산 동쪽 고개와 서쪽 고개가 경복궁의 양팔과 같아 이곳에 문을 내서는 안 된다고 했답니다. 태종은 그의 말만 믿고 숙정문을 폐쇄했다고 하네요. 또한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여인들이 음란해지고 풍속을 해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는 속설도 전해집니다.

    서너 걸음 뒷걸음질 쳐서 보는 열린 성문 안 모습, 잠시 그 모습만으로 조선시대에 온 착각이 듭니다. 그 당시 잠긴 성문에 손을 대고 기도하는 여인들의 모습이 지금도 보이는 듯합니다. 다들 무슨 소원을 그토록 정성껏 빌었을까요.

    성문 양쪽으로 놓인 돌계단을 올라 문루로 올라가 봅니다. 앞으로 놓인 길은 그전보다 다소 평평해 보입니다. 이제는 처음처럼 높은 계단을 오를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내려가는 일만 남았으니까요.

    와룡공원까지 100M 앞이란 안내판이 보입니다. 성안에서 다시 성 밖으로 나오면, 중간을 가로지르는 성벽이 나무와 풀숲 사이로 사라집니다. 적재 재소에 붙어있는 안내판을 따라 숲길을 따르면, 어느새 다시 잃어버렸던 성벽과 마주합니다.

    여기서부터는 한양도성 순성길의 출발점, 성북동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아마 이 길처럼 흙 길의 멋이 살아있는 구간은 없을 겁니다. 길 위에 깔아둔 짚을 밟으며 왼쪽으로는 다채로운 숲을 벗하여 높다란 체성을 끼고 걷습니다. 곧게 난 그 길을 걸으며 그간 걸었던 길들을 되돌아봅니다.

    와룡공원으로 내려와 다시 북정마을 카페 앞 버스 정류장까지 갑니다. 그렇게 순성장거를 처음 시작했던 그때로 돌아와 있습니다.

    청운대에서 굽어보던 광화문 밖 육조거리 풍경을 떠올려봅니다. 그렇게 다시 지금까지 걸어온 순성길을 생각해 봅니다. 그 오랜 시간, 한양도성은 모두가 함께 살아낸 길이었습니다. 모두가 함께, 한 시대에 존재하며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이어가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긴 순환이 지금까지 한양도성을 따라 이어져 우리에게로 왔습니다. 그 끝없는 이야기 속 한가운데 우리는 이렇게 서있습니다. 어디 서있다 뿐입니까, 이 가파른 길을 기꺼이 힘내서 두 발로 직접 올라와 보고 느낄 수 있는 삶을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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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도성은 그 모든 길
    내내 토닥여줬습니다

    지금 이대로, 그 모습 그대로 이곳을 걷는 당신과 먼 과거의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고 한양도성은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당신은 오늘도 내일도 앞으로도, 우리가 그랬듯이 그냥 그곳에 서 있으면 된다고... 그러니 앞으로 다가오는 모든 것들은 흘러가는 대로 스스로 이 궤도 안에 자리 잡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순성장거를 마치고 돌아온 북정마을에서 다가오는 모든 것들에 대한 그 든든한 격려를 다시 되새겨봅니다.

    처음에는 어렴풋한 인상이라고 느꼈던 감정들이 성문에서 다음 성문으로 넘어갈 때마다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 곁에 있는 한양도성이 이 시대의 증인이 되어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을까요. 그렇게 지금까지 걸어온 한양도성의 길은 모든 존재의 확인이었습니다.

    그 어떤 여행에서도 찾을 수 없는 특별한 자부심을 주는 한양도성의 길. 특별히 어떤 소감으로 이 길에서 받은 모든 것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 길을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참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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